***몇년전 저의 동기 홈피에 게재했던 자료인데, 동창 여러분들도 한번 읽어 보셨으면 해서 올립니다.
요즈음 동성애에 대해서 금기시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제 거의 없을것이다.
그만큼 세상이 많이 변하고 일부에서는 이러한 제3의 성을 인정하는 풍조가 서서히 일어나고있으며,
이미 미국의 여러주에서는 그들의 걸혼을 합법화하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유교적인 사고방식속에서 성장한 대부분의 우리들은 동성애에 거부반응을 보이는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추세에 마냥 나 몰라라 할수만도 없는것 같아서
우리가 알만한 세계적인 유명인 중에 동성애나 양성애를 한 사실이 있는 인물들에 관한 자료가 있어
올리니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조그마한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첨부파일 음악을 클릭하시길)
나이팅게일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톰보이 기질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1840년대, 마리안느 니콜손이라는 사촌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나중에 그녀는 니콜손에 대해서 '일생에 정열적으로 사랑한 단 한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니콜손은 자신의 오빠가 나이팅게일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로 나이팅게일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나이팅게일이 자기 오빠의 청혼을 거절하자 이에 격분한 니콜손은 나이팅게일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이로 인해 충격에 휩싸여 나이팅게일은 그당시 천대받던 직업인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일생을 사회 봉사에 바치며 살았다.
마르셀 프루스트
현대문학에 새로운 길을 개척한 20세기 최고 최대의 소설로 꼽히는 대하소설 '잃어 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마르셀 프루스트. 프루스트는 레이놀드와 루시앙과 같은 또래들과 사랑을 했다. 사회 선배격인 페네롱, 앙트완느 비베스코등과는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나아갔고 율리히, 아고스티넬리 등의 후배와는 육체적 사랑에 빠졌다고 하며 그마저도 싫증이 나자 직업적 남색가들과의 성교에 탐닉하면서 사악함을 쫓아다녔다고 그의 전기작가인 조지 페인터는 말한다.
△ 스티브 카렐은 '리틀 미스 선샤인'서 마르셀 프루스트를 연구하는 자칭 세계적 권위의 학자로 등장한다.
"마르셀 프루스트 알지? 프랑스 작가인데 와전히 패배자야. 직업을 가진 적이 없었지. 짝사랑만하는데다 게이였지.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쓰느라 20년을 보냈어. 하지만 셰익스피어 이래로 가장 위대한 작가일지도 몰라. 하여간 그는 인생의 막바지에 도달해서 뒤를 돌아보고 이런 결론을 내렸어, 자신이 고통 받았던 날들이 자기 인생 최고의 날들이었다고, 그때의 자신을 만든 시간들이었으니까. 행복했던 때는? 완전히 낭비였지. 하나도 배운게 없었어." - 리틀 미스 선샤인 中
그의 작품 '잃어 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중심적인 주제는 동성애며 동성애적인 코드로 가득 차 있다. 프루스트의 우주에 나오는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이 끝내는 동성애자로 드러나고 책의 후반부를 인상적인 동성애의 수호성인 바론 드 샬루가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동성애가 핵심적인 고리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는 동성애를 다룬 최초의 현대적 작가로서 앙드레 지드와 함께 동성애 현상을 현대 문학의 세계의 중심적 위치에 올려놓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남성 작가들이 전통적으로 구사해 온 소설작법에서 벗어나 특유의 '의식의 흐름' 장르를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로 20세기 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다. 그녀는 1912년에 판사출신인 레오나드 울프와 결혼했지만 사실상 그녀가 강렬한 정서적 유대감을 느낀 대상은 늘 여성이었다.
첫째는 '상상속의 근친상간'이라 할 정도로 사랑한 그녀의 언니 바네사였고 그 뒤로 마쥐 번, 바이올렛 디킨슨, 에델 스미스등에게 강한 유대감을 느꼈으며, 사랑에 진정 빠진 것은 1922년 비타 색빌 웨스트를 만난 후였다. 실험적으로 시작되었던 그들의 관계는 20년 내내 지속되었으며 그녀의 작품 '올란도'도 웨스트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1915년부터 환청을 듣는등 정신적 이상을 보인 그녀는 1941년에 자신의 광기로 남편이 고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오즈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 버지니아 울프를 소재로 한 영화 '디아워스'. 니콜 키드먼이 버지니아 울프로 분해 베를린 영화제, 아카데미 시상식서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현대 레즈비언의 발전에 있어서 태동기 인물인 그녀의 영향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가고 있다. 그녀의 문제제기와 전망, 그리고 숯한 이야기들을 통해 그녀는 그토록 오랫동안 부정당해온 여성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발굴해내기 위해서, 여성들의 자신들만의 방을 가질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었다.
앨런 튜링
컴퓨터 기초 원리를 제시해 컴퓨터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 앨런 튜링. 계산기 학회에서 컴퓨터 과학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매년 수상하는 튜링상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튜링은 1912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기질을 드러내어 3주만에 읽기를 배웠으며 계산과 퍼즐에 능했다고 한다. 193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입학했고, 1936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938년 영국으로 돌아와 대학에서 연구 중 튜링 기계의 개념을 발표했다. 1944년엔 세계 최초의 프로그래밍 가능 디지털 전자 컴퓨터 콜로서스를 만들었다.
그러나 튜링은 동성애 혐의로 체포돼 유죄 판결을 받았고 성적 취향이 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화학적으로 거세당한다. 그는 법원의 지속적인 여성호르몬 주입으로 발기부전에 나날이 가슴이 부풀어오르는 여성형 유방이 되었고 중추신경계가 손상되는 등 치명적인 신체의 변화를 겪게 된다.
△ 애플사 로고
결국 1954년, 튜링은 견디다못해 치사량의 시안화칼륨을 주사한 사과를 먹고 자살한다. 백설공주처럼 ‘독사과’를 베어 문것이다. “사회가 나를 여자로 변하도록 강요했으므로 순수한 여자가 할 만한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다!” 이것은 튜링의 유언으로 자신의 성 정체성에 사형선고를 내린 동시대에 대한 야유였다. 그 후 20여년이 흐른 뒤, 애플사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인류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었을 때 그 이름을 ‘애플(Apple)’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먹은 무지개 빛깔(동성애 상징)의 사과모양을 로고로 택했다.
미셸 푸코
인문학, 사회과학의 많은 영역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준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 그는 어려서 그의 아버지의 강요로 엄격한 규율과 통제로 유명한 카돌릭계 쌩따니슬라 대학에 입학했고 머리는 좋았는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여 점차 뛰어난 사상가로 성장해갔다.
미셸 푸코는 자신의 기념비적 작품인 '광기와 문명'을 펴낸 해에 십년 후배인 다니엘 드페르를 만났다. 그에게서 많은 영향은 물론이거니와 한 인터뷰에서 밝힌대로 그들의 관계는 그의 표현대로 '18년간의 열정'이었다. 하지만 푸코에게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1975년에 샌프란시스코의 목욕탕. 그곳에서 게이들의 해방된 성을 보며 그는 전율하게 된다.
그는 결국 에이즈에 감염되어 1984년 6월 25일 파리의 한 병원에서 에이즈로 인한 복합 증세로 죽었지만 동성애의 역사적 의미에서 그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에 훨씬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고 절대적으로 중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테네시 윌리엄스
<유리 동물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등을 지은 미국의 대표적인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1911년에 태어난 윌리엄스는 자존심 강하고 청교도적으로 엄격한 어머니에 의해서 길러졌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며 그런 그에게 글쓰기는 유일한 피난처였다고 한다.
대학 졸업후에 그는 게이들이 많이 사는 뉴올리언즈로 이사를 갔으며 몇 번의 실패후에 '유리 동물원'이란 작품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연인은 프랭크메를로였으며 1963년 암으로 메를로가 죽을 때까지 14년이나 지속되었다. 메를로가 죽자 정신적 충격으로 알콜과 약물에 의존하다가 신경쇠약으로 병원에 수용되기도 하였다.
1970년부터 다시 창작에 몰두한 그는 여러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인생 말년에 자신의 회고록에서 게이문제를 더할 수 없이 정직하고 진솔하게 밝히게 된다. 그리고 1983년 2월 25일 뉴올리언즈 엘리제 호텔 방에서 코에 분무하는 프라스틱 병캡슐에 질식되어 죽은채 발견된다.
앙드레 지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대표작가 앙드레 지드. 1868년에 태어난 그는 엄격한 프로테스탄트로 길러졌으며 1893년에 폴 알베를 로렌스라는 젊은 화가와 북아프리카를 방문하게 되면서 사회적 성적 속박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동성애의 가능성을 비롯해 자기 속에 있는 가능성들을 엿보게 된다. 하지만 파리로 귀환한후 사회적 통념속에 묶여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무기력한 침체에 빠져들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 동안에 적십자 파리지부에서 일한 그는 1918년에 마크 알레그레라는 젊은이와 사랑에 빠져 결혼 생활에도 위기도 맞았으며, 앙드레 지드는 엄격한 청교도주의와 그의 동성애적 관능주의에서 많은 고심과 화해를 통해 투쟁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 앙드레 지드 저서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1942년 출간된 동성애를 소재로 한 소설 '코리동'은 이런 앙드레 지드의 고뇌가 잘 표현되어 있다.
오스카 와일드
일류 외과의사인 아버지와 시인이자 학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1854년 태어난 와일드는 공부도 꽤 잘해서 옥스퍼드를 우등으로 졸업했다. 대학 시절에서도 화제를 뿌릴만큼의 멋쟁이었으며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날렸다.
그는 리오드란 여성과 결혼을 해서 두 아들을 낳았으나 단란하지는 못했다. 둘째 아들을 낳은 해에 그는 17살의 옥스퍼드 대학생 로버트 로스를 만나 동성애에 빠져 들어 이후 젊은이들과 어울려 즐기는 이중 생활을 해나갔으며 1895년 동성애적 성벽으로 인해 퀸즈베리 후작과의 소송에서 패소하여 2년의 실형을 치른 뒤 재판정에서 한 그의 유명한 말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남기고는 파리로 망명한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인기를 한몸에 독차지했던 극작가였지만 스캔들에 짓밟혀 비극적인 삶을 산 그는 대중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겨 놓았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고대 그리스 사회를 규정하듯 와일드의 재판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되었다. 그 이전까지 그렇듯 철저하게, 널리 동성애자로 알려진 이도 없었고, 정체성과 성이 그렇듯 완벽하게 맞물려 있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적 정체성을 취하는 것이 가능했던 문화사가 와일드에 의해 시작되었던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동성애자 음악가로는 슈베르트, 헨델등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대중들의 상상력속에서 게이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은 단연 차이코프스키다. 광산 감독의 아들로 1840년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는 어릴 때부터 예민한 신경을 지닌 아이었으며 음악적 재능 또한 남달랐다. 학창시절은 시골뜨기라고 놀려대는 아이들 때문인지 행복한 편은 아니었으며 일반적으로 그의 전기에 보면 한 부유한 미망인과의 사랑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는 단순한 정신적 교감이었을 뿐이었다.
사회적 통념을 잘 아는 그였기에 자신을 사랑했던 한 여학생과 결혼을 했지만 아내의 끈덕진 성관계 요구 때문에 자살을 기도할 정도였다. 그가 진정 사랑에 빠졌던 것은 14살 먹은 조카 '봅'에게서이며 나중에 이들의 관계는 플라토닉적으로 이어져 갔으며 봅 역시 35세의 나이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에 관해서는 여러가시 이야기가 있지만 최근의 증거에서 그가 왕실과 연줄이 있는 한 공작의 어린 조카와 성관계를 가졌다는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음독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오고 있다. 그당시 러시아에서 동성애에 대한 스캔들은 시베리아 유배를 뜻하는 것이 었다.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356년에 마케도니아의 소도 펠라에서 태아난 그는 아버지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20살의 나이에 보위에 올라 아버지의 야망을 이어받아 세계정복의 꿈을 이루려 했던 사람이었다. 인도 북방의 힌두쿠쉬까지 진격했던 그는 진군이 더 이상 어렵게 되자 다시 귀향해서 또 한번의 정복을 꿈꾸지만 갑작스런 열병에 걸려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죽게 된다.
물론 알렉산더도 결혼을 했지만 정략적인 차원이었고, 동성애적인 첫사랑은 어렸을 때부터의 동료였고 상당한 미남으로 알려진 헤파에스티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헤파이티온이 죽었을 때 그는 미친 듯이 괴로워 했고 그를 살려내지 못한 의사를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시켰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근엄한 장례식을 치렀다. 한편 다른 고대문헌을 보면 그는 페르시아 원정시 다리우스 측근에서 얻은 시동 바고아스를 사랑해 평생 동안 친구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알렉산더 외에도 군인적 동성애자로는 시저, 트라잔, 프레디릭 대제,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인물이 존재하지만 군인적 색깔의 명성에 덮쳐서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은 가려지게 마련인데도 알렉산더는 남성을 사랑한 군인으로 역사상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바이런
1788년에 귀족가문에서 태어난 바이런은 학창 시절 내내 상급생들로부터 그의 안짱다리로 인해서 놀림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다. 그런중에서도 그는 나이 어린 학급 친구들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첫 사랑은 로드 클레어였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우정이상의 감정을 지녔었다. 곧이어 캠브리지 대학에 들어간 바이런은 성가대 소년인 존 에델스콘에게 그의 표현대로 '순수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격정적인 사랑과 열정'을 품었다. 한동안 환락가에 묻힌 생활로 인해 몸이 피폐해졌지만 친구와 떠난 지중해 여행을 통해 그리스의 소년들에게 상당히 매료된적도 있었으며 다시 런던으로 돌아돈 뒤에도 몇몇 소년들과 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남자들과의 관계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메리 샤워드, 테레사 구치올리등의 여성들과도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피사에 더 이상 머물 수 없게 되자 터키와의 전쟁중이던 그리스로 가서 지냈으며,물론 이곳에서도 그는 한 소년과의 사랑을 남겼으며 1824년 그리스가 터키를 공격하기전 열병에 걸려 죽게 된다.
그는 물론 낭만주의자였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 가로 놓인 건널 수 없는 거리에 대해서 동료 낭만주의자들보다도 더 어둡고 냉소적으로 바라본 낭만주의자였다. 관습에 묶이지 않은 그의 동성애로 인해 아주 일찍부터 그는 게이들의 상상력을 점화시킨 선구자였다. 19세기나 20세기의 비평가들은 바이런의 이러한 양성애적 기질을 깡그리 무시했으며 많은 사료가 말살되어졌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결국 밝혀지게 마련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년 빈치에서 태어난 그가 처음으로 동성애자임을 알 리는 신호탄은 24살 때 17살 소년에게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견책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상당히 비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그의 노트들은 거울에 비춰봐야 바로 보이게끔 반대로 씌워졌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파트너였던 세자르, 볼트라피오, 안드리아, 그리고 그의 입양한 상속자 델찌같은 젊은이들을 근사하게 차려 입히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 말고는 우리가 그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 바는 별로 없다. 그는 또한 카프로찌라는 10살짜리 소년을 데리고 산적도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남자일 것이라는 음모설또한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온 얘기다. “모나리자가 여성일 리가 없다. 자세히 모나리자를 쳐다보면 느낄 수 있다. 모나리자가 남성이라는 것을. 마치 트랜스젠더(성 전환자)의 감추지 못하는 면도자국처럼.”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4년에 걸쳐 그린 그림이지만 결국 완성되지 못한 채로 남았다.
미켈란젤로
르네상스 시대 대표적인 화가로 <다비드>, <천지창조> 등 회화와 조각, 건축 등 분야서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 힘있고 감정이 담긴 인간 중심적인 표현을 시도하였다. 그는 상당히 화를 잘내고 말 수도 적으며 내성적인 성격에 상당히 검소한 생활을 살았다. 그는 자신을 조각가라고 여기고 있었으나, 소네트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인 탁월함을 지닌 만능 엔터테이너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가 지은 대부분의 소네트는 젊은이들에게 주로 보내기 위한 연시였다. 57살에 토마소 드 카발리에리라는 멋진 젊은 귀족을 만난 미켈란젤로는 나머지 생애 동안 그에게 몰두했다. 수많은 소네트를 지어 그에게 보냈으며, 육체적 관계보다는 소크라테스가 주창한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의 죽음 역시 카발리에의 품안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남자를 사랑한 남자로서 그의 성적 취향은 그의 작품에서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그가 그린 여성들조차도 남성적인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오늘날 근육질의 아름다운 게이를 선호하는 대다수의 게이들의 선구자가 아닌가 싶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동성애자였다. 그는 소년을 향한 열정이 그 어떤 사랑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주장하며, 동성애의 철학적·도덕적 논리를 제공했다. 그의 동성애 파트너는 미남 청년 알키비아데스다. 비록 육체적인 관계보다 정신적인 사랑을 더 강조했다는 주장도 없지 않지만, 소크라테스는 동성애자임은 분명하다. 동성애와 이성애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연상의 남자가 아름다운 소년에게 느끼는 에로틱한 정열에서 어떻게 사랑이 움트는지를 탐구했다. 그는 소년에 대한 남자의 열정은 신성한 광기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열정에 사로잡히면 물질적인 욕구에 연연해 하지 않으며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관대하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정은 육체적인 것으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소년을 사랑하는 연상의 남자는 소년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그 소년이 체현하고 있는 철학적인 아름다움에 경탄한다. 이 열정이 지니고 있는 광기는 시와 철학이 가지고 있는 광기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플라토닉 러브라고 일려져 온 바의 핵심 내용이다. 그러한 사랑을 통해 연상의 남자는 아름다운 소년의 연인이자 교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소크라테스 역시 여느 동성애자와 마찬가지로 독설이 심했는지 적이 많아지고 오만방자한 재판정에서의 자기 변호로 인해 사형을 언도받고는 독약을 깨끗이 비우고 세상을 등졌다. 어쨌든 그는 결국 정체성과 자기인식을 찾는 모든 동성애자들에게 근본적인 철학적 지주가 되어왔으며 오늘날의 동성애는 그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포
사포는 기원전 6세기쯤 에게해의 레스보스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과 그녀가 태어난 섬의 이름은 훗날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들을 지칭하게 된 '레즈비언'의 기원이 된다. 그녀 역시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소녀들과 깊은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중세 이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작품은 상당히 많이 전해졌으나, 중세의 검열을 거치면서 많이 파기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대변했던 레즈비언의 색깔은 사라지지 않았으며 한 예로 마리 앙트와네트가 "서로 사포주의자라고 부르면서 사포를 추종하는 요물 집단의 앞잡이"란 표현을 보더라도 그녀의 사라지지 않는 명성을 엿볼 수가 있다.
셰익스피어
아직 뚜렷히 밝혀진 건 없지만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호색한에 난봉꾼인데다 양성애자라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앤 해서 웨이와 결혼했지만 20년 넘게 그녀와 별거를 했으며 묘비에 아내를 자기 옆에 묻지 못하게 하는 독설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희곡에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고 단지 '뜻대로 하세요','십이야'등에서 일부 등장 인물이 다양한 혼성적 옷차림이나 성별을 구분할 수 없게 하는 에피소드 등을 보여 주는 데 그치고 있다.
하지만 1590년대 쓰여져 셰익스피어의 허가없이 1609년에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 소네트에서는 분명한 표현이 나타난다. 총 154개의 소네트로 이루어진 이 책은 "나를 낳아준 오직 한 분 미스터 W.H."에게 바쳐졌다. 그 W.H.가 누구냐는 것에는 많은 논란이 되었지만 추측만 있을뿐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앞쪽의 126편은 아주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청년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 뒷부분은 흑발의 여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모든 소네트가 내용이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분석하자면 세익스피어가 사랑하는 청년과 그 청년이 사랑하는 흑발의 여인에 대한 적개심이 드러나 있다.
특히나 예를 들어 흠모의 남성을 "주인-여주인"등으로 부르는 복합적인 면에서 보여지듯이 여성에 대한 사랑을 표현 하는 호칭을 남성 친구에게 붙이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며 실상 초판 발행시 이 소네트에서의 대명사들이 바뀌고 순서가 바뀌어서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이 소네트가 동성애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동성애자냐 아니냐는 지금까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오랜동안 그의 소네트는 동성애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읽혀져 왔다.
엘리노어 루즈벨트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퍼스트레이디. 여성의 권리, 세계 평화, 지구상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의 편에 서서 거리낌없이 활동함으로써 논란을 몰고 다녔던 영부인이었다. 물론 그녀 역시 미국 대통령의 아내로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공적 역할에는 제한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가 유지한 사생활의 성격과 의미에 대해서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최근에 분명해진 것은, 남편도 충분히 동의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녀가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그녀는 그리니치 은신처를 빌려준 에스터 라프와 엘리지베드 리드, 낸시 쿡과 마리온 디커맨 등 두쌍의 레즈비언과 각별히 친한 관계롤 지냈다. 만년에 그녀는 남자 보디가드 얼 밀러와 레즈비언 저널리스트 로레나 히코크를 정열적으로 사랑했다. 1920년대 이후에 그녀가 사귀었던 여성들도 대부분 레즈비언이었고 그녀의 사랑도 당연히 편지와 밀실에서 이루어 졌다.
미국 사람들만의 오만한 생각이지만 '세계의 퍼스트레이디'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는 여성 운동에도 많은 발자취를 남기었지만 동성애가 터부시되는 공적인 역할보다 은밀하지만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사생활을 더 정열적으로 산 여성이었다.
록 허드슨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3년 연속 '최고 인기상'을 받으며 제임스 딘과 함께 당대 최고의 청춘 스타였던 록 허드슨. 1925년생인 그는 검은 눈빛, 깊은 목소리, 훨칠한 키로 인해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의 전형이었으며 그의 동성애는 일생동안 대중의 눈을 피해갔다. 50년대 중반,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퍼지자 그의 매니저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비서인 필리스 게이츠와 허드슨을 결혼시켰다. 하지만 그 결혼은 결국 3년만에 파경을 맞았고 허드슨의 은밀히 남자들과의 관계를 계속해 나갔다.
그가 죽을 때까지 게이임을 감출 수 있었던 것은, 소문을 단지 소문으로만 축소시켰던 스튜디오의 갖은 노력 덕분이었다. 그의 친구들도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완벽한 이성애자로 살아갔다. 하지만 1985년 6월, 그는 파리의 한 호텔에서 쓰러졌고, 처음에는 간암으로 발표되었지만 한 달 후 대변인은 록 허드슨이 심각한 병에 걸렸음을 알렸다. 그 병은 바로 에이즈였다. 악몽 같은 10주를 보낸 후 그는 1985년 10월 2일 베벌리힐즈에서 사망한다. 화장된 유해는 태평양 위에 뿌려졌고, 그의 유산은 '에이즈연구재단'의 설립 기금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사망 후 그의 연인이었던 마크 크리스천이 재산권 소송을 하면서 평생 동안 감추어졌던 그의 호모 섹슈얼리티는 구체적으로 드러나면서 팬들을 경악시켰다. 그는 에이즈로 사망한 최초의 유명스타였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비극적 죽음은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울리는 경종이 되어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에이즈에 대해 느끼는 충격은 대중들에게 두 갈래로 나타났다. 첫째는 어떤 사람도 에이즈에 면역되지 않는 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그토록 남자답고 멋진 허드슨이 동성애자로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의 인기로 인해 에이즈라는 중대한 공중 보건 위기에 대한 관심이 정당화 되었으며 경각심이 높아지자 정부 지출도 증대되었다는 점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평생 자신의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살아왔으며 자신의 병을 통해 고통스럽게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고백해서 여타 동성애 커밍아웃 인권자들보다 어쩌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루돌프 누레예프
1938년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를 따라 '우파 발레단'공연에 몰래 들어가 발레 공연을 보고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맞았다. 일찍이 성을 잘내고 오만하고 타협할 줄 모르기로 이름난 그의 기질 덕분에 성공한 뒤에도 러시아의 행정관료와 부딪히는 경우가 많았으며 서구에 대한 동경심을 일찍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로 망명했다. 망명뒤에 그의 춤은 더욱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 올레리 케렌스키에 따르면 그의 인기는 동물적 마력과 관능성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중년 여성에게는 모성적 본능을, 젊은 여성들에게는 그와 한쌍이 되고픈 열망을, 그리고 많은 남성동성애자들에게는 욕구를 불러일으켰다고 기술하고 있다.
실제로 그가 악명높은 어떤 게이 바에 고정적으로 드나든다는 소문들도 그의 관객의 주요 부분을 이루는 사람들의 인기를 더 굳게 해주었다.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우리는 루돌프를 원한다.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루돌프'라면 더욱 좋다"는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그가 잠자리를 같이 한 사람도 꽤 많아 보이며 무용수의 짧은 직업적 수명덕에 70년대 후반서부터는 한물간 취급을 받긴 했지만 그는 춤추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나 아래서나 기막히게 그는 아름다운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무대에 마지막 모습을 나타낸 1992년에의 그의 모습은 수척하고 부축을 받지 않고는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으며 1993년 1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에이즈에 따른 심장 합병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실상, 이 세기의 발레는 게이들의 무대가 되어왔지만 그는 그 무대를 주름잡은 요정같은 왕자였다.
존 포브스 내쉬 주니어
게임 이론과 미분기하학 분야를 연구한 미국의 수학자이다. 존 허샤니, 라인하르트 젤텐과 함께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했으며 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 '뷰티풀 마인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화의 원작이기도 한 실비아 나자르의 책 <뷰티풀 마인드>에서는 내시가 1954년 공중화장실에서 음란행위로 체포된 사실이 언급되어 있으며, 그가 24세 부터 약 5년에 걸쳐 3명의 남성과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존 내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뷰티풀 마인드'. 미국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다. 하지만 동성애적 부분은 제외되어 의도적으로 뺀 것이 아니냐는 동성애 보호단체의 원성을 샀다.
앤디 워홀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로 '팝의 교황', '팝의 디바'로 불린다. 대중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미술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디자인 등 시각예술 전반에서 혁명적인 변화를 주도하였으며 그의 작품과 더불어 워홀이라는 인물 자체가 팝을 대표한다. 살아 생전 이미 그는 전설이었기 때문에 굉장한 명성을 누렸을 뿐 아니라 엄청난 부를 쌓고 미녀들과 염문을 뿌리기도 했다. 하지만 워홀은 실제로 동성애자(게이)였으며 돈 많은 여인, 할리우드 스타들은 초상을 화폭에 담는 모델로서 선호했을 뿐이다.
프레디 머큐리
비틀즈와 더불어 전 세계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전설적인 영국의 록그룹 퀸의 리드싱어인 프레디 머큐리. 1991년 그는 마지막으로 'A Winter's Tale'이라는 곡을 남기고, 11월 24일 런던에서 에이즈로 사망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1991년 에이즈로 죽을 때까지 8년 동안 남자 애인 짐 애튼과 살았으며 동성애자 사회에서 그는 우상처럼 받아들어졌다. 당당하게 동성애를 노래한 머큐리의 용기있는 커밍아웃은 지금도 동성애자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안데르센
덴마크의 동화작가로 '즉흥시인'으로 독일에서 호평을 받아 유럽 전체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여 '인어공주', '미운 오리새끼' 등 아동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수많은 걸작 동화를 남겼다.
안데르센은 탁월한 많은 동화를 써 '어린이의 절친한 친구'라는 이미지를 심어 놓는데 성공하였으나, 뒷날 추적 끝에 쓰여진 한스 마이어의 전기에 의하면 그는 어린이 혐오자였다. 만년의 병석에서 그를 위한 기념비 건립 계획이 문제되었을 때 그는 자기 동상 주변에 어린이들의 동상을 추가하지 못하도록 금하기까지 했다. 또한 여러 작품에서 지순한 이성애를 그렸지만 그는 동성애자였다. '미운 오리새끼'의 '백조'는 모두 동성애라는 국외자의 설움을 앓고 있던 안데르센 자신의 굴절된 자기표현이기도 하다는 분석도 있다.
아르튀르 랭보
19세기 프랑스의 시인으로 술취한 배, 일뤼미나시옹,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등 시대를 앞서갔던 환상적인 작품들을 발표하였으며 그는 이 모든 작품을 10대 시절에 쏟아낸 조숙한 천재였다. 장 아르튀르 랭보는 근대 문학, 음악, 예술에 깊고 오랜 영향을 미쳤다.
△ 랭보와 베를렌의 만남을 그린 영화 '토탈 이클립스'
1871년 프랑스 상징파의 시인 P.베를렌의 초청을 받고 간 파리에서 베를렌과의 관계가 동성애로 발전하게 된다. 베를렌은 신혼의 아내마저 버리고 랭보와 동거생활을 할정도였다. 훗날 베를렌과 결별한 랭보는 아프리카로 유랑의 길을 떠난다. 진실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나 37세의 생일을 맞은 뒤 채 한달도 되지 못해 아프리카서 암으로 요절하였다.
슈베르트
천재성을 다 펼치기도 전인 31살에 요절했지만 무려 1,000여 곡을 작곡하여 남긴 낭만파 초기의 거장이다.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가곡을 600곡 이상 작곡한 까닭에 '가곡의 왕'이라고 불린다. 15살에 이미 교향곡을 작곡했으며 18살 때에는 <들장미>, <마왕> 등 145편 가량의 가곡을 만들었다. 따라서 슈베르트의 천재성은 모차르트에 비견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집을 나와 친구 집을 전전하며 음악가 생활을 선택했고 친구들은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곡을 만들면서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가난은 계속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고 그는 이러한 생활을 견뎌내지 못하고 동성애를 즐기는 등 방탕한 생활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성병에까지 걸리게 되자 자포자기의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허무와 절망 상태 속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때 만들어진 <겨울나그네>는 슈베르트의 암울한 시절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작품으로 최고의 가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1828년 3월 슈베르트는 자신의 작품으로만 연주하는 최초의 공개 연주회를 열 수 있는 행운을 맞이했다. 그러나 행운도 잠시 그해 11월 21일 슈베르트는 31살의 나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평소에 수줍음이 많고 소심했던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무척 좋아했으나 베토벤을 만날 용기가 없어 일생에 딱 한 번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평소의 소원대로 빈의 중앙묘지 베토벤 묘 옆에 묻혔다.
트루먼 카포티
동성애가 혐오의 대상이었던 1900년대 중반 미국에서, 그는 게이로서의 삶을 즐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단지 천재작가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TV 토크쇼의 단골손님, 상류 사회 사교계의 슈퍼스타였다. 작가적 명성과 더불어 독특함과 괴상함을 오가는 복장, 여자 같은 높은 목소리, 날카로운 유머는 어디서나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게다가 그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가 자신의 소설 성공을 기념하기 위해 연 <블랙 앤 화이트>파티는 지금도 앞에 ‘전설적인’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어찌나 거물급 명사들만 참석했던지, 참석자 중 한 명이자 카포티를 좋아했던 앤디 워홀은 파트너에게 “여기서 우린 그저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 앤디워홀과 카포티
앤디 워홀은 카포티를 좋아하여 카포티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쓰고 그의 집 근처를 어슬렁거렸다고 한다. 마침내 워홀은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 카포티의 어머니로부터 아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이후에도 카포티의 관심을 끌려는 시도는 계속됐고 1952년 휴고 갤러리에서 열린 자신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카포티의 단편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15개의 스케치로 구성된 그림을 전시하기도 했다.
△ 트루먼 카포티의 일대기를 옮긴 영화 '카포티'.
지아니 베르사체
지아니 베르사체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지안 프랑코와 함께 이탈리아가 낳은 3대 패션 디자이너로 추앙 받는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지아니는 밀라노에 가서 패션과 텍스타일을 공부했다. 이탈리아가 낳은 3대 디자이너, 즉 조르지오 아르마니·지안 프랑코와 함께 ‘3G’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패션계의 이단아로 불렸다. 통속적인 구속 상태를 거부하는 자유정신으로 전세계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늘 영감을 불어넣었고, 새로운 변화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전세계에 200여 개의 부티크 및 400여 개의 아울렛에서 6,000여억 원의 매출을 올리며, 화려하게 성장해가는 성공의 신화 한가운데서 승승장구하던 지아니는 1997년 7월 15일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남자친구 안토니오 다미코와 함께 마이애미 비치 자택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신문을 가지러 문밖에 나갔다가 한 남자에 의해 총살되었다. 범인은 평소 베르사체를 흠모하던 스토커 드류 캐내넌이었다. 하지만 사건 10일만에 검거된 범인은 체포 당시 조그만 보트에서 베르사체를 사살항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쏴 자살한 채로 발견되어 베르사체의 죽음에 관한 무수한 뒷소문만 남겨진 상태다.
▽ 이외 동성애자인 패션 디자이너들 (너무 많아서;;)
플라톤
동성애 예찬(?) 중에서 가장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은 바로 철학자 플라톤.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고 그는 강조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동성애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에 하나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 당시의 지성인들은 동성애를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차적인 형태의 사랑으로 여겼다고 한다.
프란시스 베이컨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뒤틀린 몸, 괴기스런 표정과 고통에 절규하는 몸부림,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본능과 고통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표현하며 20세기 미술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영국 출신의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 그는 평생동안 이성을 사랑해본적이 단 한번도 없는 동성애자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모델도 대부분이 남성이다.
△ 베이컨과 조지 다이어
그에겐 그림 모델로 만난 조지 다이어란 오랜 애인이 있었으며 그와 베이컨은 7년이란 오랜 시간 동안 열애했다. 그러나 1971년, 베이컨이 프랑스 파리서 작품회를 열기 이틀 전 조지 다이어는 파리의 한 호텔에서 자살을 한다. 베이컨은 조지 다이어의 죽음에도 다이어를 소재로 한 작품을 다수 그렸다. 그가 남긴 다이어의 그림 중 하나인 '조지 다이어 두상 연구'는 후 소더비 경매서 경매 최고가인 2744만2685달러에 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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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컨이 그린 조지 다이어의 모습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니체와 프로이트 등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철학자 꼽히는 비트겐슈타인. 1889년 4월 29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최상류층 부르조아 가정에서 태어난 루디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양모 공장으로 떼돈을 번 자신의 아버지 뒤를 따르기라도 할 것처럼 기술학교에 다녔는데 당시 그는 프로이센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던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Sex and Character'를 읽고 그에게 깊은 공명을 느끼게 된다. 저명한 미국의 퀴어 이론가인 아서 에반스는 젊은 날 비트겐슈타인이 가졌던 호모포비아, 유대인혐오증, 여성차별적 생각들, 더 나아가 '논리-철학 논고'가 내장하고 있는 신비주의도 오토 바이닝거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가정한다.
지금껏 밝혀진 것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 시절 한적한 공원 등지에서 했던 쿠르징(동성애자들이 파트너를 찾아 돌아다니는 행위)을 기점으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58세때 케임브리지의 의대 학부생이자 자신의 제자였던 벤 리처드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다. 스스로 벤과의 사랑을 '위대하고 희귀한 선물'이며,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행복이라고 표현할 정도였고 그를 잃게 될 것이라는 번민에 빠지곤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벤과 간헐적으로 동거에 들어가는 등 그 마지막 염화에 제법 열정적이었고 이것은 1951년 4월 28일 타계할 때 까지 큰 곡절없이 계속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연인은 알려진 것만으론 2명인데 한명은 그가 한 때 러시아에 같이 가려고 계획했던 프란시스 스키너며 나머지 한명은 그의 임종을 지킨 벤 리처드다.
▲ 오른쪽 맨 뒤 학생이 20세기의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아돌프 히틀러며, 바로 앞줄의 학생이 비트겐슈타인이다.
엽기적인 사실 하나. 1899년 4월에 태어난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 두 사람은 린츠 레알슐레에서 2년간 학창시절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 연구자인 킴벌리코니시는 흥미로운 주장을 하는데,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데이비드 호크니
데이비드 호크니는 프란시스 베이컨과 함께 동성애자들의 삶을 거침없이 담아내는 화가 중 한명이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업은 성적 정체성의 공표와 같은 진정성의 표현이 현대미술의 '진실'을 보증하는 방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호크니의 '세 번째 사랑 그림(1960)'은 동성애를 표현하고 있는 그림 중 하나인데 그때까지도 영국은 동성애를 불법적인 행위로 간주했다. 작가는 이 그림을 두고 동성애가 '나의 일부'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동성애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행위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림의 내용이 매우 암시적으로 표현된 까닭에, 작가가 동성애자인지 아닌지 모르는 사람은 그것을 쉽게 간파할 수 없었다.
△ 호크니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수영장 시리즈.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시인, 평론가로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의 허상과 실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에서 그는 이탈리아 사회의 부정의 더 나아가 세계 전체의 파시스트적 구조 내지 기제 권위주의적 체제 등 모순을 지적하였고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성찰하였다.
△ 살로 소돔의 120일
1975년, 파졸리니는 사드의 소설을 1944년 나치 치하의 이탈리아로 옮겨 파시즘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영화화한 '살로 소돔의 120일'을 발표하는데 이 작품은 그의 유작이 되고만다. 흔히 이 영화에 출연했던 자신의 동성애 상대 소년 쥬세페 피노 펠로시에게 맞아 죽은 걸로 유명하지만 아직도 살해 동기는 뚜렷히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높은 인플레이션을 맞는 등 정치적 지형이 극도로 경색됐던 이탈리아의 상황에 지배 계급 전체에게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던 파졸리니의 발언에 불편했던 이탈리아 지배 계급 내 분파들이 파졸리니를 제거했다는 설도 등장하고 있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모도바르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이며 내 어머니의 모든 것으로 52회 칸영화제 감독상과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알모도바르는 스페인 칼자다 드 칼라트라바 태생으로 어린 시절 수도원에서 억압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 마드리드로 가 낮에는 전화국 말단직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들과 어울리며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전위 연극에 심취하고, 잡지에 희곡을 기고하거나 영화에 관한 짧은 글들을 쓰면서 모은 돈으로 8mm 카메라를 구입하여 단편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 알모도바르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작품 '나쁜 교육'
그의 작품세계는 양성애와 동성애가 뒤섞인 애정관계, 자살, 포르노, 기괴한 유머 등으로 이루어진, 언뜻 보기에는 황당하고 싸구려 에로영화 같은 줄거리를 통하여 보수세력에 대한 반항과 인간의 본능적인 측면을 솔직하게 대변하고 있다.
데릭 저먼
데릭 저먼은 평생 동성애자의 조건을 영화의 전면에 내세웠다. 비스콘티, 파스빈더, 파졸리니 등 대표적인 동성애 감독들이 있었지만, 저먼처럼 극단적이고 일방적이지는 않았다. 저먼은 데뷔작 <세바스찬>을 발표하며 한순간에 동성애 영화의 중심에 섰다. 그는 동성애를 아름답게 혹은 동정심이 일어나게 그리지 않았다. 철저하게 소통이 안 되는 외로운 고립자로서의 동성애자들이 저먼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저먼의 유언처럼 보이는 작품이 죽기 3년 전에 만든 <에드워드 2세>(1991)다. 많은 영화인들이 저먼의 최고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왕은 감독처럼 동성애자로 묘사되고, 개인의 삶과 국가의 이성이 충돌할 때, 개인은 어떻게 고통받는지를 혹은 국가의 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외압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동성애자들과 경찰들이 광장에서 충돌하는 현재의 런던의 모습을 삽입하는 등 수백년이 지났지만 전혀 변하지 않은 소수자의 삶의 조건을 표현하고 있다.
엘튼 존
공식석상에서조차 '미세스'로 불리우는 남자. 최고 인기의 여성가수들에게만 출연 기회가 주어지는 콘서트에 청일점으로 홀연히 등장해 여가수들보다 더 큰 박수 갈채를 받는 이 남자. 바로 가장 유명한 게이 가수 엘튼 존이다. 1976년 11월 13일자 롤링 스톤지를 읽던 팝 팬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스타 엘튼 존이 롤링 스톤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게이임을 고백한 것이다. 정확하게는 양성애자라고 밝힌 그의 커밍 아웃은 '동성애'나 '양성애'라는 말조차 익숙하지 않던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줄 만했다. 게다가 그는 팝 음악계가 낳은 슈퍼스타였으니 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뉴스 이후, 그의 음악을 좋아하던 많은 기성 세대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반면, 젊은이들은 오히려 호기심어린 눈으로 그의 행적을 쫒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엘튼 존의 커밍 아웃은 게이 문화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발히느 못하고 방황하던 음지 속의 동성애자들은 그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며 서서히 양지로 나오기 시작했다. 동성애자들이 평등한 권리을 위한 투쟁에 나서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후에 데이빗 보위, 프레디 머큐리, 보이 조지, 조지 마이클등 팝스타들이 자신들이 '양성애자'임을 밝히고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엘튼 존의 선행이 있었기에 가능햇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여성 가수들만 출연하기로 되어 있던 '디바스 라이브'에의 초대를 선뜻 받아들였을 정도로 '게이 가수'임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가 게이들의 권리를 위한 사뢰운동과 에이즈 예방을 위한 자선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엘튼 존은 2005년 12월, 오랜 연인이었던 캐나다 출신의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퍼니시와 결혼식을 올린 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