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월간조선 2012년 3월호의 313페이지에 해당하는 내용을 인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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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호의 행복편지
사랑하는 아들아! 나를 용서해다오!
대현아 내 사랑하는 아들 대현아!
한창 꽃다운 나이 열여섯에 꽃잎처럼 네 몸을 던져 이 모진 세상을 떠나버렸구나.
그토록 싱싱했던 너의 몸매, 그토록 아름답던 너의 얼굴을 한 줌의 재로 바꿔 속초 앞바다에 뿌리며 목놓아 외쳐대던 네 이름 대현아!
너는 너무도 비정하게 우리를 슬픔과 고통 속에 남기고 떠나버렸구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너.
산 위에 오르면 구름 속에, 들꽃 사이에 피어났다 스러지는 네 얼굴, 너는 항상 내 가슴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지. 포도를 좋아했던 너는 포도알과 함께 살아나고, 파파이스의 닭요리를 좋아했던 너는 파파이스 가게 간판과 함께 살아나고, 유난히 모자를 좋아했던 너는 네 또래의 모자 쓴 학생만 봐도 되살아나고, 내 생일선물로 사준 내의를 입을 때마다 너의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살아난단다.
어쩌다 너를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어 기다리지만 정작 너를 만난 다음 날은 그다지도 우울할 수가 없어 꿈 얘기를 안 하고 지나는 날이 많단다.
지금도 네 생일이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수많은 네 친구. 설날이면 세배 오는 네 친구들. 가슴이 찢어지는 6월 8일 네 영혼을 위로하는 날마다 찾아오는 네 친구들을 볼 때마다 네 엄마나 나는 너를 대하듯 반갑기는 하지만 목이 메어 할 말을 다 못 하면서 이렇게 살고 있단다. 지금은 의젓한 대학생이 되어 한창 바쁘게 휘젓고 다닐 네가 없는 이 부모의 마음은 항상 응어리져 피멍이 맺혀 있단다.
네가 힘들어할 때 난…
무엇이 그토록 너를 방황하게 했던가?
무엇이 너를 죽음까지 몰고 가게 했던가?
나는 과연 너를 위해 무엇을 했던가?
나는 얼마나 너를 이해했었던가?
나는 얼마나 너를 믿고 사랑했었던가?
대현아! 이 못난 아비를 용서해 줄 수 있겠니?
나는 세상의 헛된 명예와 돈만을 위해 살아 왔었구나.
미친 듯 회사 일에만 쫓겨 살았지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던가?
네가 힘들어할 때 친구가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준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네 인격을 존중하고 네 취향을 이해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나는 내 방식대로 네게 너무 무리한 것만 요구했었지?
운동도 잘하고 반장까지 했던 너를 만족하지 못하고, “1등 해라, 저것 해라!”하고 계속 내 방식대로만 요구했었지.
대현아! 네 넋이라도 나를 용서해다오.
그리고 네 엄마를 지켜다오.
네 엄마가 이렇게 버티며 곱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란다.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했었어. 네 엄마는 너를 위해 매일 기도하며 봉사활동도 시작했단다.
너를 잃은 뒤, 우리 남은 가족에겐 바뀐 것이 많지만 그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란다.
목숨을 바꿀 수 있다면…
대현아! 내 목숨보다도 귀한 사랑하는 내 아들아!
만약 인간의 목숨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당장에라도 너를 대신 살려내서 나보다 값있고 멋있게 살아가도록 하고 싶구나. 내 마음을 받아주고 용서해다오.
대현아, 뒤늦게나마 택한 이 길이다.
세상의 모든 욕망을 던져버리고 너와 같은 애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겠노라고 택한 이 길이구나.
물론 힘들지. 나 혼자서 세상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수도 없지.
그러나 너 때문에 택한 가시밭길인데 어찌 후회하고 물러설 수 있겠니?
힘이 들 때마다 지갑 속의 네 모습을 대하면서 ‘힘을 다오’ 속삭이며 지금껏 열심히 해오고 있단다. 그동안 세상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하고 있어서 그동안 변한 것도 많단다.
넌 지켜보고 있겠지?
그래서 이 땅에 다시는 너처럼 아까운 죽음이 없고, 이 못난 아비처럼 피맺힌 아픔이 없는 좋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구나.
대현아, 너를 사랑한다.
하늘나라에서 서로 만날 날까지 편히 쉬거라. 내 아들아!
아버지가
대현아! 넌 이제 하늘에 핀 꽃이 되었구나. 지상에서는 열여섯에 그만 허리가 부러져 꽃망울 한번 맺어보지 못한 어린 청춘이더니 하늘에 올라가서야 비로소 꽃으로 피었구나. 꽃으로 활짝 피어서 또 다른 열여섯, 열일곱, 열다섯 이 땅의 어린 청춘들 두 눈 부릅뜨고 지켜주고 있구나. 대현아! 너를 보내고 처음 돌아올 땐 모든 것이 눈물이더니 모든 노래가 눈물이더니 이젠 모든 눈물이 노래가 되었구나. 너의 어린 뼛가루를 속초 앞바다에 흩뿌리고 돌아올 땐 모든 웃음이 울음이더니 이젠 모든 울음이 웃음이 되었구나. 사랑이 되었구나. 사랑이 되었구나. 하늘에 핀 꽃 대현아! 너를 보내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보았다 네가 받은 그 수많은 표창장 뒤에 숨어 있던 학교 생활의 비애를 네가 받은 우등상장과 네가 받은 개근상장과 네가 받은 반장 임명장 뒤에 숨어 있던 학원 폭력의 발톱을 그때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카인이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앙굴라마였다. 대현아, 보아라. 비록 너의 어린 몸은 갔어도 너의 맑은 영혼은 이제 십자가로 남아 하늘의 꽃으로 피어 있는 것을 청예단으로 활짝 피어나 이 땅의 어린 청춘들을 말없이 지켜주고 있는 것을 그래 대한민국에 핀 너의 그 십자가 영원하리 그래 하늘에 꽃 핀 너의 그 십자가 무궁하리! 2002. 11. 1 |
어느덧 무정한 세월은 흘러가 계절이 바뀌고 새해가 되었는데도
보고 싶은 너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구나.
보고 싶은 대현아!
이 엄마는 언제나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불러도 대답 없는 너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텅 빈 너의 방 책상 앞에 앉아서 매일 눈물로 기도한단다.
무엇이 착한 너를 그토록 괴롭게 하고
무엇이 여리기만 하던 너에게 그토록 무서운 생각을 갖게 하였는가?
너로 인해 엄마 아빠는 행복했었고 네가 있어 삶이 즐거웠었는데…
이제는 슬픔으로 가슴이 저리고 원통함과 허망함으로 가슴이 무너져내린다.
등하굣길의 네 또래의 남학생들에 시선이 머물고
학교 앞길을 지날 때면 나도 모르게 두리번거린단다.
행여나 네 친구가 누구라도 없나 하고 말이야.
너에 관계되는 모든 게 다 소중하게만 생각되는구나.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너는 기억하겠지?
엄마 아빠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를…
그리고 이 말은 너에게 확실하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단다.
너의 대답은 며칠 전 꿈속에서 분명하게 들었지.
더 커진 모습으로 내 품에 꼭 안겨서 엉엉 울면서 “존경했었어요”라고
너무나도 처절하고 절실하게 말했었지.
나는 꿈속의 너의 그 아름다운 모습이
현재의 너의 진실한 모습이라 믿고 영원히 살아가련다.
대현아!
또 한 가지 너에게 들려줄 게 있는데
네가 간 곳으로 따라가겠다고 울며불며 발버둥치던 그 많은 좋은 너의 친구들이
저번 여름 방학에도 너를 만나러 그 엄마들과 함께 동해바다에 갔다는구나.
대현아!
너를 잊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을 기억하고
하늘나라에서나마 편히 잠들거라.
다시는 이 땅에 너처럼 한 맺힌 영혼이 없도록 하는 데
엄마 아빠는 노력할게.
안녕…
1996. 2. 7
너를 너무너무 사랑하는 엄마가
1995년 6월 8일. 16세의 꽃다운 나의 아들 대현이가 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죽음으로 그동안 학교에서 폭행과 협박 그리고 강탈이 뒤범벅된 집단 괴롭힘 끝에 삶을 마감하고 저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갔습니다. 내 사랑하는 외아들 대현이는 해외생활도 잘 적응하였고 한국에서 학교생활도 잘 적응해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반장으로 선출되어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높고 활달했습니다. 그런 대현이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홀로 다른 학군의 모 고등학교에 배치된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습니다.
내 아들은 준수한 얼굴과 좋은 성적으로 남녀 간에 인기가 높아 소위 짱들의 타깃이 되었던 것입니다. 중학교 친구들도 없는 상황에서 홀로 낯선 학교에서 고등학교 2학년의 짱들로부터 끊임없는 시달림과 구타를 당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몰랐습니다. 가끔 이상한 느낌이 있어 물어볼 때면 거짓말로 사실을 은폐하기 때문에 우리 식구들은 대현이가 그렇게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고, 회사 일에만 몰두하는 것이 가장의 큰일인 양 생각하고 가정에 너무나 소홀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대현이는 운동도 잘하고 덩치도 컸지만 하늘 같은 형들에게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혼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던 아들은 끝내 온몸으로 항거하며 아파트에서 두 번이나 몸을 던져 이 부모 가슴에 이토록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참기 힘들고 괴로웠으면 차라리 죽을 생각을 하고 또 결행했을까 돌이켜 생각하면 너무나도 가슴이 메어집니다. 저는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를 자학하며 이 힘든 길을 선택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젠 쉬고 싶어요.’ 16세 대현이가 남긴 마지막 메모입니다. 운동도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는 건강한 아이에게 무엇이 그토록 지치게 하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학교 선배 5명의 끈질긴 괴롭힘이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을 견디기가 힘든 아들은 결국 자살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당시 해외출장 중에 벌어진 그 엄청난 충격에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지만 부끄럽고 놀라워 그저 조용히 사건을 마무리해 나갔습니다. 아직 미성년자였고 아이 엄마를 생각해 화장한 뼈를 멀리 속초 앞바다에 뿌리고 돌아오던 날 저는 무참히도 울었습니다. 당시 사회적으로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연이어 붕괴되면서 사회가 극도의 정신적 충격에 휘말려 매사가 혼돈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확한 사연도 알아야 하고 특히 대현이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가해 학생 5명을 하나씩 찾아내 반성문을 받아냈습니다. 고개를 떨어뜨린 그 아이들을 어쩌지 못하고 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바쁜 회사 일에 매달리며 잊어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악몽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한 달 후에 우리 대현이를 그토록 괴롭히던 아이들이 또 다른 대현이 친구 2명을 불러내 얼마나 두드렸는지 한 애는 팔이 부러지고 한 애는 기절까지 했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그동안 참아왔던 내 분노는 걷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는 검사를 찾아가 처벌을 의뢰하고 만약에 국가가 못 한다면 내 개인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그 다섯 아이를 이 세상에서 끝내버릴 결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두 명의 피해학생 어머니는 완강히 진술을 거부하였고 이로 인하여 더 이상 폭력 문제를 법에 고발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비로소 이 학교폭력 문제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학교, 가정, 학생 등 사회 모두에게 엄청난 구조적 문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실상을 세상에 알리고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결심에 내 아들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는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아무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려 해”
‘부모에게 말하면 집에 불을 지르겠다.’ ‘누나도 가만 두지 않겠다.’ 각목으로 폭행을 일삼던 가해학생들을 만나 보니 그저 겁에 질린 고등학교 2학년생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들 사회에서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대장이었지만 어른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어린애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 순간을 모면하고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죽을 줄은 몰랐습니다’는 공허한 소리만이 그들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들은 다른 학생을 폭행하고 돈을 뺏고 아무 생각 없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무관심하고 신경을 쓰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학교는 진실을 외면했고, 다른 피해자 부모들은 사실을 숨기기 바빴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왜 시끄럽게 만드느냐? 당신 혼자 떠든다고 세상이 바뀌는 줄 아느냐? 우리 아이가 장난으로 한번 때린 것이 무슨 큰 잘못이라고 대현이의 죽음을 우리한테 문제 삼느냐? 학교에서는 어린아이들끼리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왜 큰 문제 있는 학교인 양 난리치고 있느냐? 아무도 진실을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내 자식만 문제가 없으면 된다는 이기주의 앞에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학교는 그리고 우리의 학부모들은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대현이의 죽음은 천지를 바꿔놓았습니다. 저는 원래 한 회사 중견 경영인이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학교폭력을 그냥 좌시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학교폭력 문제 전문가처럼 되어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룹사 기조실장으로 엄청나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폭력을 예방하기 위한 활동을 한다는 것이 사실상 어려웠지만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의 시간을 이용하여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한 사업이 ‘학교폭력예방재단’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재단 설립 준비를 마치고 설립허가를 서울시에 냈는데 담당자의 의견이 학교폭력이라는 용어가 들어가는 단체는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겪는 폭력은 학생 중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불량학생에 의한 것이지 학교 자체에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학교폭력이라는 이름 대신 청소년폭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허가 신청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사회에는 학교폭력이라는 용어나 문제의식은 없었습니다. 막연하게나마 이지메라는 생소한 일본어로 전하는 시절이었습니다. 학교도 이러한 문제를 노출시키지 않고 소수의 분쟁, 자라면서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정식으로 거론하는 것을 심히 꺼리는 분위기였습니다. 피해학생은 당하는 것도 수치스러운데 감히 누구에게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며, 피해 부모님 측도 보복이 두렵고 자기 아이만 무사히 진학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두려움 속에 참고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이 당시나 지금이나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대기업 전무는 누구든 하지만 학교폭력 예방은 내가 할 수밖에 없어
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청소년폭력예방재단(청예단)’을 설립하고 한 달도 안 돼 그렇게 피하고 싶던 ‘학교폭력’이란 단어가 전국 최대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학교폭력 실태를 고발하는 언론 보도를 보고 격노해 고건 총리 내각에 ‘학교폭력 근절 대책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막중한 그룹 기조실장 전무가 한편으로 시민운동을 한다고 하니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회장실에서 호출이 오더니 ‘이 일은 쪽박 차기 딱 맞는 일인데 바로 사장 직함으로 승진하든가 아니면 사표를 내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분명했습니다. 그날 오후 사표를 내고 회사를 나왔습니다. 사장은 적임자가 많이 있지만, 이 일은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나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꿈도 펼쳐보지 못한 상태에서 하늘나라로 간 대현이를 지켜주지 못한 죄를 늦게라도 갚아야 했기에, 제게는 사장 직함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아들이 폭력과 협박에 시달려 시름시름 앓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한 못난 아비가 이제라도 아들에게 사죄하는 심정에서 어렵지만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 일을 시작하면서 학교폭력이라는 거대한 철옹성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내부적으로는 전문 직원을 양성하면서 비영리 공익단체를 한 개인이 꾸려간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피눈물나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끝없는 희생과 긴장과 구걸과 투쟁의 세월이었습니다. 만나는 친척이나 친구들이 늘 저에게 하는 말이 미안하다는 말이었습니다.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어떻게라도 도움을 받으면 제가 쓴 돈도 아니지만 그렇게 마음의 짐이 되는 것도 괴로웠습니다. 항상 죄인처럼 지내는 심정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때로는 직원들 급여를 주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임차료는 당연히 체불되고… 하물며 색안경을 쓰고 다른 눈으로 바라볼 때는 정말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왜 이리 힘든 일을 하고 있나? 지금이라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지만, 그래도 가슴 깊이 다짐한 아들과의 약속이고 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많은 아이를 생각하면서 열심히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을 때도 많습니다. 우리의 도움으로 자녀들을 살리고 감사의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부모님들을 만날 때 저는 큰 보람을 느낍니다. 또 이 일을 하면서 가슴이 따뜻한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 저는 큰 힘을 받고 다시 힘을 내서 마음을 다잡고 일어서기를 반복합니다.
마음 아픈 일보다는 좋은 일들을 기억하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일을 계속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 내면에 있습니다. 만약에 제가 이 일을 하지 않고 다른 활동을 하고 살았다면, 항상 세상을 혐오하고 원망하며 어둡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몸을 던지고 죽도록 봉사함으로써 비로소 그 몹쓸 죄책감을 이기고 원통함과 가슴 저리는 고통을 극복하고 역설적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면 조금 이해가 되실는지요? 저는 이것이 우리 내외를 살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청예단을 살렸다고 믿습니다.
지난 17년간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사회가 뭘 해줬나?
학교에 만연된 고질병, 그 그늘에서 학교 가기를 두려워하고 낙오하는 어린아이들, 치유하기 힘든 정신적 질환까지 앓고 가정까지 파괴하는 불법 폭력! 갑자기 폭력적인 학생들에게 끌려가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해 세 살 나이의 지능으로 뇌기능을 상실해 영원히 환자로 살아야 하는 유리 양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중학교 3학년인 15세 때 폭행을 당해 지금도 매일 악몽에 시달리며 자기 머리를 쥐어뜯고 우는 유리 양! 누가 그녀와 그 부모의 아픔을 없애줄 수 있겠습니까? 파출부로 어렵게 사는 형편에 병원에 1년 이상 누워 있다는 하도 딱한 사연에 간호사가 우리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 전화를 해서 도와달라고 한 것이 인연이 돼 신문에 사연이 나가고 그때 전국에서 한푼 두푼 6000만원을 모아 병원비를 대준 것이 우리 사회가 한 전부가 아니었던가요? 우리는 유리 양처럼 억울하고 딱한 사연이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왜 외면하고 있을까요? 아버지의 가출과 어머니의 끝없는 눈물. 그 가정은 도저히 행복하기 어려운 비참한 상황을 언제까지 이어가야 할지 답답하기만 합니다.
저 자신마저 학교폭력 문제해결이라는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17년 가까이 많은 일을 해왔건만 결과적으로 그래서 무슨 개선이 있었는가 하는 자문을 해볼 때에 두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학생과 그 부모를 위해 상담부터 최선의 도움을 드리고자 노력해 왔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 학교폭력의 실태를 해마다 조사해 알리고 관련 전문도서를 발간하고, 국가의 어느 부서인가는 이 문제에 항상 깨어 있도록 소리쳐 왔다는 것 등으로 자위하고 싶지만, 우리 사회에서 생업도 포기하고 월급도 없이 비영리 공익법인을 만들어 홀로 버텨나가는 고통을 감내할 수 있었던 것은,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았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학교폭력 문제가 제기되고 나서부터 오늘까지의 17년 동안 어린 초등학생이며 여학생까지 더욱 끔찍한 사건들로 점철해 있는 현실을 보면서 과연 이 나라는 국민을 위해서,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원망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사건이 날 때만 잠시 뉴스로 나오고 금방 모든 것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무척 한탄스러웠습니다. 이번 대구 중학생의 자살 직전의 자필유서는 어리고 착한 학생의 엄청난 고통과 폭력의 무서움과 죽기 직전의 효심을 선명하게 보여주면서 연말에 모든 국민에게 다시 한 번 큰 경종을 울려주었습니다.
자기 손자를 학교에 보낼 나이가 되었으나 취학 등록을 뒤로 미루고 태권도 도장부터 열심히 보내는 할머니를 잘 압니다. 학교에 가서 남에게 맞거나 심부름질당하지 않도록 담력과 체력을 키워 보내야겠다는 것입니다. 모임에서 만난 한 아버지는 늦둥이로 얻은 자기 중학생 딸을 아예 외국으로 유학 보내고 생활비 때문에 무척 힘들게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 딸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폭행을 당해 정신병을 앓거나 반항아로 비뚤어지게 자라는 것을 우려해 무리하게라도 유학비를 대면서 정작 자기들은 최대한 절약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마음 아픈 사연들입니까?
또한 가해학생들이 성인이 돼서 범죄자로 전락해 사회의 부담이 되는 경우가 일반 청소년에 비해 3~4배나 높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폭력의 피해학생이나 가해학생이나 모두가 사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학교폭력을 망국병이라고 합니다.
교권은 추락하고 학생 인권만 강조하는 세상이니…
이처럼 무서운 망국병인 학교폭력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아직 소득이 낮아 인권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한 저개발국가를 제외하고는 모든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모두의 고민거리입니다.
그래서 그들 선진국들도 이 문제로 계속 고민해 오면서 공통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방향은, 다수의 선량한 학생을 보호하는 데 많은 비용과 인력을 쓰기보다는 소수의 소위 문제 학생들을 집중적으로 격리하고 치료해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이나 직업훈련으로 그 나름의 삶을 찾아주는 방향입니다. 즉 저비용 저인력으로 고효율을 만드는 사회정책이 학교폭력 해결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최근 이러한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독일을 집중적으로 돌아보았습니다. 독일은 그러한 사회비용을 감안해서 청소년기부터 소년원에 가야만 할 소위 고위험군의 문제 학생들을 선택적으로 분류해서 전문단체에 충분한 사회비용을 지불하면서 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방도 중요하지만 청소년에게도 엄격한 제도를 가지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하고, 그래도 문제를 일으키면 공권력으로 엄격하게 통제하는 한편 치유 가능한 청소년들을 선별해 공무원이 아닌 민간전문단체가 그들을 집중 치유하도록 적극 지원하는 민관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불가피하게 그런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해학생도 한때는 피해학생이었다! 그러니 봐주자(?)는 사고방식으로는 영원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일단 폭력이 발생하면 결연하게 그 순간에 그것은 불법이라는 원칙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폭력의 악순환 고리는 영원히 끊기 힘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김황식 총리의 학교폭력 종합대책 발표에 폭력 재발 시에는 엄격히 격리하고 처벌을 강화한다는 것은, 선진국 사례에서 보듯이 불가피한 추세 같습니다. 그보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학생들에 대한 엄격한 치유프로그램이 전문가들에 의해 강제 적용되어야만 비로소 청소년 범죄 내지 학교폭력 문제가 점차 감소되고 결국 사회비용도 감소되리라 생각합니다.
학교폭력 해법은 학교에 그 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주된 장소와 시간이 역시 학교이고, 신고와 처리도 역시 학교가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선생님들부터 앞장서서 학교폭력을 근절하겠다고 단호히 선언하고 발 벗고 나설 때, 비로소 이 문제가 정상 궤도로 쉽게 풀려갈 수 있지 않을까요? 최근 추세를 보면 교권은 추락한 반면 학생들의 인권만 강조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 미래가 잘되려면 우선 교사부터 존중받고 교권이 바로 서야 비로소 교육이 힘을 받을 것입니다. 우수한 인재들이 교대로 가야 하고 충분한 인성과 실력을 갖춘 선생님들이 양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솔선수범해야 할 교사들 내에서부터 학교폭력 해법을 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교사들 스스로가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결심한다면, 학교폭력은 지금보다 70~80%는 줄어들 것입니다. 즐겁고 신나게 다녀야 할 학교가 50%의 학생이 피해 경험이 있는 고통의 도가니라는 것을 보면 교육정책의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교사들에게 보람과 긍지를 심어주는 교육정책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교사들이 소극적으로 행동한다면 경찰이 아무리 나서도 본질적인 해결이 어렵습니다. 가까운 일본도 처음에는 검찰과 경찰이 주체였으나 지금은 문부성이 주체로 학교폭력을 담당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다신 너 같은 아이가 없어야지”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정책책임자의 의지입니다. 이 학교폭력 문제를 망국병으로 인식하고 핵심 부서장부터 이를 중대 사안으로 분류해서 끊임없이 챙기며 또한 전문 인력과 예산을 투입해야 합니다. 청소년보호법,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청소년 출입제한 업소지정, 청소년지킴이운동, CCTV 설치 등 법률이나 제도적 장치가 많이 있으나 실천이 못 따르고 있어 정부 부처부터 이것을 정확히 지키고 실천하는 의지가 필요하며 언론 등 여론이 항상 감시자의 역할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며 시민 모두가 발 벗고 나서야만 더 이상 학교폭력의 문제로 인한 소중한 우리 아이들의 고통과 죽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내 아이만 안전하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물이 깨끗해야 물고기도 안전하며 물을 떠나서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내 아이 혼자만 안전할 순 없습니다.
법과 질서를 지키고 퇴폐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를 배척하는 모습을 어른들이 먼저 보이면 아이들도 자연히 그렇게 교육됩니다. 특히 이번 기회에 공권력은 외부에 있는 폭력조직과 연관되어 있는 일진회 같은 악의 뿌리들을 강력히 소탕해야만 학교 내에서의 범죄를 없앨 수 있습니다.
“진정 고통받는 청소년과 그 가정을 위해 여러분은 어떤 도움을 주시나요?”하고 여쭙고 싶습니다. 지금 시급한 것은 바로 학교폭력으로 신음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지금 저희에게는 쉬지 않고 걸려오는 “도와주세요!”하는 아이들과 어머니들을 상담하는 장소와 사람이 더욱 필요합니다. 최근 상담전화가 4~5배로 폭증해 직원들이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또 죽겠다는 아이에게는 당장 달려가야 합니다. 다툼이 있는 곳에는 화해시키기 위해 쫓아가야 합니다. 또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관련 자료를 많이 만들어야 하고 또 배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폭력과 피해학생에 대한 실태조사 연구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학교폭력은 소리 없이 개인과 가정을 병들게 합니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그들에게 절실한 도움을 주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피해자를 위한 치료 교육과 가해자, 소위 학교부적응 학생을 위한 선도교육도 필요합니다. 피해학생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자아에 대한 정체감을 살려주어 자신의 감정을 올바로 표현하게 하고, 또한 가해학생들에게는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어 그들도 꿈과 희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시간이 날 때면 속초에 가서 대현이와 대화를 합니다. ‘대현아, 이제 편히 쉬어라! 너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하지만 아빠는 지금 다른 힘든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어! 다시는 너 같은 아이가 없어야지. 힘들기는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을게… 네가 하늘에서라도 나를 도와다오!’
대현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벌써 33세입니다. 최근에는 대현이 친구들이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많이 보내옵니다. 그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결혼을 축하해 줍니다. 화사한 결혼식, 축가, 왁자지껄한 결혼식 속에서 나는 늘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낍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고통을 주셨는지 하느님이 밉기도 합니다. 무슨 죄가 그리 크다고 부모는 평생 자식들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할까요.
주변을 돌아보면 대현이처럼 어렵고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렵고 힘든 일을 당한 학생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때는 세상에 너희밖에 없는 것처럼 외롭고 힘들 거야. 그렇지만 조금만 둘러보면 너희와 만나서 이야기하고, 아껴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 그러니까 혹시 힘든 일을 겪게 돼도 낙심하면 안 돼. 너희가 절망하면 너희를 아껴주던 사람들은 더 크게 상처를 받거든. 그러니까 밝게 살아야 한다. 너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어. 어려운 고비는 누구에게나 있어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곧 좋은 세상 행복한 세상이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