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2/25 비룡 46차 남한산성 시산제 (1)에 이어지는 기록 영상이다.
---
11:35분 암문을 통과해 성 안으로 들어가 조금 올라가니, 수어장대 부근에 시산제를 준비하는 서기완 총무와 문웅비 부총무가 보였다. 밤에 와서 터를 잡았다고 한다. 원탁 모양의 석대도 부근에 있어 안성맞춤의 자리였다. 시산제 제단이 준비되는 동안 동문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12:00시 정각에 시산제가 시작되었다. 42명의 동문이 참석한 가운데 총무의 ‘시산제 선포’에 이어, ‘먼저 가신 산악인에 대한 묵념’을 하고 나서 사신제가 진행되었다. 제물점시-분향-초혼-참신-초헌-독축-아헌-종헌-헌작 순으로 제례의식이 이어졌다.
정순배 회장의 분향, 서기완 총무의 초혼에 따라 모두 모자를 벗고 참신에 임했으며, 초헌과 윤익상 총대장의 독축 후 14회 이계홍 동문의 ‘고천문’ 낭독이 있었다. 이어서 참석 동문들의 아헌-종헌이 이어졌다. 이로서 제단에서의 제례의식이 끝나고 음복-소지-사신 순으로 시산제를 마쳤다.
음복에는 시루떡과 홍어-돼지고기-김치에 막걸리가 나와 모두들 홍탁삼합을 즐겼다. 먹고 마시기는 좋았어도 준비해 가져오느라 고생했을 총무단의 노고를 어찌 잊을 손가...
산성의 날씨는 매우 추워 시산제 내내 매섭게 부는 바람에 시달렸는데, 음복시간에는 세설(細雪)까지 흩날려 동문들을 괴롭혔다. 추위를 이겨내려고 모두들 소주-막걸리를 마구 들이켰다. 몸을 데워주는 효과는 있었지만, 하산 때는 발 옮기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시산제 자리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음복을 마친 후, 12:55분 끼리끼리 무리지어 다음 코스를 향해 떠났다.
먼저 수어장대(守禦將臺)로 올라갔다.
산성의 수비는 수어청이 맡았는데, 전-좌-중-우-후의 5개 영(營)이 여기에 소속되어, 지휘소 격인 남장대-동장대-북장대-서장대에 나누어 주둔했다. 현재는 수어장대(守禦將臺)라고 부르는 서장대 하나만이 남아 있다.
원성 내부 넓이는 627,200평 정도이고 둘레는 7,545m인데, 옹성을 포함한 8,888m와 외성 3,213m를 포함한 성벽 전체의 길이는 12,355m에 이른다고 하며, 성벽 높이는 3∼7m이다. 산성 안쪽은 구릉성 분지를 이루고 있는 준평원이며, 산성천이라 부르는 작은 하천이 있어 성안을 흘러 동문 옆 수문을 통해 빠져나간다.
수어장대를 둘러본 후 성곽안길을 따라 걸었다. 봄철이나 가을철에 온다면 멋있는 산책길이 될 것이다. 국청사 구경은 뒤로 미루고, 13:20분 우익문(서문)을 통과해 성 밖으로 나와 하산길에 들어섰다.
산성 밖 서쪽 저지에는 한강의 지류인 탄천이, 동쪽에는 광안천이 북으로 흘러 본류와 합류한다. 결코 완만하지 않은 경사가 성벽과 결합하여 단단한 자연 방어선을 이루기 때문에 외부에서 쉽게 공략하기 어려운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성안에는 45개의 연못과 80여 개에 달하는 샘이 있어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기 때문에 장기간 농성에 유리하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는 이 곳에 피난하여 항전하다가 45일 만인 1637/01/30일 성문을 열고 나가 삼전도에서 청 황태극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나라가 부강해야지 이런 물리적인 방어수단은 장기전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4:00시 가까이 되어 삼거리를 지나고 14:12분에 ‘산성골 맛집’에 당도해 시산제 뒤풀이자리에 합석했다. 뼈없는 뚝배기 오리탕과 도토리묵 무침에 막걸리/소주를 걸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거나한 얼굴로 식당을 나서니 15:00시가 지났다.
동문과 함께 하는 시간은 항상 즐겁다!
역사는 기록입니다.
사진과 글을 자세하면서도 정확하게 올려주시니
후배들이 선배님의 수고를 공짜로 얻어가는 것 같아서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합니다.
‘동문과 함께 하는 시간은 항상 즐겁다!’
저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