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터뷰] 올들어 국군 전사자 유해 403구 발굴 박신한 국방부 발굴단장 ? '목숨 바칠 가치 있는 대한민국' 느끼게 할 것 |
발행일 : 2008.06.30 / 여론/독자 A25 면 기고자 : 장일현 |
6·25전쟁 때 전사하거나 실종된 국군 장병은 16만2394명이다. 이 중 2만9202명만이 국립현충원 등에 안장돼 있다. 13만3192명은 아직 한반도 어느 땅속에 묻혀 있다. 그들을 찾아 유가족 품에 돌려주는 일을 하는 곳이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발굴단)이다. 지난 27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선 올해 상반기(3~6월) 전국 15개 지역에서 발굴된 유해 519구 중 북한·중공군 116구를 제외한 국군 전사자 403위 합동봉안식이 엄수됐다. 그날 저녁 박신한 유해발굴감식단장(대령)을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향후 5년이 6·25 전사자 유해 발굴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왜 5년인가. "6·25전쟁이 터진 지 올해로 58년이 지났다. 20대였던 병사들은 대부분 80대가 됐을 것이다. 그들의 전우와 형제, 부인 등 1세대들이 생존해 있을 때 좀 더 많은 증언과 자료 수집, 채혈(採血)이 이뤄져야 한다. 이들 1세대가 사라지면 2, 3세대 유가족들의 의지와 희망도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얼마나 찾을 수 있나. "전사(戰史)로 볼 때 13만여명 중 남한 지역엔 8만~9만명이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에 2만5000~4만명, 비무장지대에 1만5000명 정도다. 이 중 남한 지역 전사자가 우선 대상이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도로가 뚫리고 개발 사업이 있었나. 그래도 국민들이 '나라가 이 정도 애쓰고 있구나'하는 정도는 돼야 하지 않겠나." ―지금까지 발굴한 유해는? "유해 발굴은 2000년 육군이 전쟁 50주년을 맞아 3년 한시 사업으로 시작했다. 이후 육군의 '지속 사업'으로, 올해 초 '6·25 전사자 유해발굴법' 제정으로 반(半)영구적 사업이 됐다. 2년 전까지 매년 평균 200여구를 발굴했다. 유해발굴감식단은 작년 국방부 산하로 창설됐다. 작년 534구, 올 상반기 519구를 발굴했다. 전체적으로 작년까지 모두 2018구를 발굴했다. 이 중 국군은 1560구, UN군 8구, 북한군 339구, 중공군 111구 등이다." ―적과 아군을 어떻게 구별하나. "굉장히 중요하고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잘못하면 적이 국립묘지에 묻힌다. 군번표나 도장 등이 나오면 쉽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함께 나오는 유품이 중요하다. 적과 아군이 사용한 총탄, 입었던 군복과 군화, 단추 등이 다르다. 동·서양 구분은 유골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미군은 C-레이션(전투식량) 봉지가, 중공군은 특이하게 생긴 밥 그릇과 수저 등이 나온다. 이들을 전사(戰史)에 비추어 종합 판단한다. 99% 정도 정확하다고 자신한다." ―발굴작업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기록에 구체적인 전투와 매장 위치가 적혀 있는 곳이 적다. 포괄적으로 포천, 파주 이런 식이다. 그나마 그런 위치라도 있는 경우는 30~40%에 불과하다. 특히 전투에서 패한 경우 기록을 더 찾기 어려운데, 문제는 패한 전투일수록 국군 사망자가 많다는 것이다. 주변 지형이 바뀐 경우도 많아 위치 찾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해 발굴 장소를 선정하나. "전투 기록과 생존자 증언이 기본이다. 전투 현장 어딘가엔 반드시 전사자 유해가 존재한다고 본다. 다음엔 현장에 가서 주변을 살피고, 참호 등 전투 흔적을 찾는다. 발굴 유해의 80% 정도는 개인호나 교통호 같은 전투 현장에서 발견된다. 나머지는 주민들이 가매장한 것이다." ―미국의 '전쟁포로·실종자확인사령부(JPAC)'와 비교한다면. "우리가 절대 따라갈 수 없는 건 그들이 갖고 있는 방대한 자료이다. 거의 모든 전사자의 개인 기록을 갖고 있다. 신체적 특성과 입대 전 각종 병원 기록도 있다. 또 전장(戰場)에 가매장한 경우 위치를 표시한 지도와 바위·나무 등 주변 지형·지물 특징을 적은 보고서, 사진 등을 갖고 있다. 전쟁 때 우린 이런 자료들을 만들지 못했다." ―유해는 어떻게 처리되나. "DNA 분석작업이 끝나면 화장을 해서 국립현충원 납골당에 안치하며 일 년에 두 번 합동봉안식을 한다. 컴퓨터에 보관된 DNA 자료는 채혈된 유가족의 DNA와 비교된다. 앞으로 신원이 확인 안 된 유해는 미국처럼 특수 처리해 보관할 계획이다." ―유가족 채혈 상황은 어느 정도인가. "현재 5000명 정도다. 앞으로 매년 3000명 정도로 늘려 1단계로 5년 이내에 2만명 정도의 DNA 샘플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발굴 유해도 1만구 이상 돼야 한다. 그래야 무작위 DNA 비교를 했을 때 가시적인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유가족들의 기구한 사연이 많지 않나. "수없이 울었다. 작년에 70대 후반 할머니가 '19살 때 시집 가 1년도 함께 못 산 남편을 찾아달라'며 왔다. 전쟁 때 뱃속에 있던 아들은 그 동안 빈 산소인 줄도 모르고, 가묘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채혈을 위해 수십 년간 가슴에 담아뒀던 비밀을 아들에게 털어놓고, 두 모자는 끌어안고 한참이나 대성통곡을 했다. 그 남편 유해는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에 있는데, 이 사실을 아직 알리지 못했다. 10대, 20대 때 찍은 '젊은' 남편의 사진을 보며 그리워하는 할머니들을 볼 때도 반드시 유해를 찾아드리겠다고 다짐한다." ―발굴단 구성은? "계획·조사·발굴·감식·지원 등 5개 과에 134명이 있다. 발굴팀은 8개로 팀장 1명과 발굴병 6명, 기록병 1명 등 8명으로 구성된다. 발굴병은 대학에서 인류학과 고고학, 법의학 등을 2년 이상 전공한 '지원병'들이다. 2004년 군에 '발굴병' 특기가 생겼다. 감식은 형질인류학을 전공한 민간 출신 전문가가 담당한다." ―그 장병들은 어떻게 생활하나. "발굴기간엔 현지 부대에서 생활한다. 산악지역에서 일하기 때문에 점심은 주먹밥을 자주 먹고, 전투식량을 먹을 때도 있다. 입대 후 5㎏ 이상 몸무게가 빠지고, 12㎏까지 빠진 병사도 있었다. '돈 주고도 못한 다이어트를 한다'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장비는 제대로 갖추고 있나. "발굴반은 땅속 50~70㎝를 탐지하는 금속탐지기와 캠코더, 디지털카메라, GPS 장비 등을 각 2대씩 갖고 있다. 본토층과 퇴적층 깊이를 파악하는 표본추출기도 있다. 발굴할 때는 작은 호미나 칼, 솔 등으로 수작업을 한다. 내년까지 전자현미경과 초음파세척기, 건조기, X-선촬영기, 3차원 입체생성기 등이 도입된다. 과학적인 감식을 위해서다." ―유해 발굴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나. "전사자 유해를 가족들에게 찾아주는 것은 단순히 보답·보은의 차원이 아니다. 이 나라가 목숨을 바쳐 지킬 가치가 있는 나라라고 스스로 느낄 수 있게 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이 사업은 또 6·25전쟁을 후손들이 절대 잊지 않도록 해준다. 국민들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도 된다. 다인종·다민족 국가인 미국의 힘은 JPAC에서 나온다고 본다. 21개 참전·의료 지원국과의 외교적 관계에도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박신한 단장 1957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를 나온 뒤 학군 18기로 임관했다. 육군 31사단 96연대 1대대장과 9공수특전여단 참모장, 36사단 107연대장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