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룡 59차 계사년 관악산 시산제에 참가했다.
해마다 새해가 시작될 무렵에 산악인들이 산을 지켜주시는 산신령께 제사를 올리면서 지난날 보호해주심에 감사드리고 앞으로의 무사 산행을 기원하는 행사다.
새벽에 기온이 -1.2°C까지 내려갔고 낮에는 12.1°C까지 올라가는 쾌청한 날씨... 산행하기 딱 좋은 날이었다.
이날 산행과 시산제 기록 영상에는 설영형 윤건 두 동문이 올린 영상이 다수 포함되었으며, 참석인원과 시산제 차례는 문웅비 총무의 시산제 결과보고와 임보혁 동문의 시산제 동영상을 참고했다. 양해를 구하며 감사드린다.
시산제는 사당역→까치고개→국기봉→철계단→관음사의 2시간 정도 가벼운 산행 후에 관음사 인근에서 갖기로 계획되었다.
09:40경 사당역에 도착해 6번 출구 쪽으로 가다가 김상운 동문을 만났다.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5번 출구로 나가자고 했다. 참 머리 좋다. 에너지를 좀 아끼며 밖으로 나가 6번 출구 밖 ‘수경공원’으로 갔다.
정순배 비룡회장은 벌써 와 있고, 10:00시가 가까워오자 낯익은 비룡 모습들이 비좁은 수경공원을 가득 채워갔다.
윤익상 총대장 박상복 선두대장이 보이고, 10회 위쪽은 4회 본인과 백원주, 10회 이수상 동문이 나왔으며, 중량급 동문들의 얼굴이 많이 보였다. 설영형 동문은 사진 찍기에 바쁘고, 보이지 않은 장명균 황근수 대장과 문웅비 총무는 먼저 떠났겠지...
10:10 수경공원을 출발해 10:23 ‘까치산 생태육교’ 아래서 좌회전해 올라가 관악산 둘레길 1구간 걷기를 시작했다.
관악산 둘레길 1-2-3 구간 15km는 ‘서울 둘레길’의 시범사업으로 2010년 착수해 2011년 말 완료한 산책로인데, 새로 만든 것이 아니고 기존의 길을 정비한 것이다.
이 중 1구간은 까치산생태육교→무당골→전망대→낙성대공원→서울대입구 사이 6.2km로 ‘낙성대’와 연계해 강감천 장군의 애국사상을 고취한다는 의미로 ‘애국의 숲길’이란 주제가 붙었으며, 빨강색으로 구분한다.
약간 쌀쌀한 날씨였지만 산길을 걸으니 땀이 조금씩 배었다. 10:25∼28 쉼터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10:40 관음사-낙성대 갈림 3거리 지났으며, 10:53 ‘무당골’ 쉼터에서 또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둘레길을 계속 걸었다.
2011년 8월 관악산 산행 때 만난 후 오랜만에 19회 김재헌 동문과 둘레길을 함께 걷게 되었다. 집안에 우환이 있어 고생이 컸는 것 같았는데, 요즘 좀 나아졌다고는 하나 하루 빨리 회복해 평안을 되찾았으면 좋겠다.
갈림길을 지날 때마다 방향표지판을 보면 시산제 장소인 ‘관음사’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낙선대공원’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었다. 가깝다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빙빙 돌려서 운동께나 시킬 작정이구나 싶었다.
‘무당골’을 지나고 ‘만수천 계곡’을 건너 낙성대공원 방향으로 가다가 11:10 ‘낙성대능선’에 다다른 것 같았다. 박세무 선두대장의 안내에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길을 올라갔다.
11:34 ‘상봉약수’ 능선3거리에 올랐다. 관악산 정상 연주대로 올라가는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사당능선을 타고 내려가게 되었다.
한남정맥(漢南正脈)이 경기/안성 칠장산(七長山 492m)에서 광교산(光敎山 582m)을 거쳐 북서진하다가 한강 남쪽에 이르러 불꽃처럼 솟구친 산이 표고 629m의 관악산이다.
관악산은 옛날부터 개성 송악(松岳), 가평 화악(華岳), 파주 감악(紺岳), 포천 운악(雲岳)과 함께 경기 오악(五岳)의 하나였다.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진 관악산은 산봉우리 형상이 마치 관(冠)처럼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관악’(冠岳)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주변 산세 중에서 으뜸이라는 뜻도 있다. 악(岳) 자체가 산을 뜻하기 때문에 ‘관악산’이라 부르는 것은 좀 어색한 이름이지만 모두들 그렇게 부른다.
관악산은 동봉(연주봉)의 관악, 서봉의 삼성산, 북봉의 장군봉과 호암산을 아우르는데, 서울/관악구-금천구와 경기/안양시-과천시에 걸쳐 있으며, 서울의 조산(祖山)으로, 강남의 서쪽 벌판에 우뚝 솟아 강북의 삼각산과 마주하고 있다.
관악산은 1968/01/15일 건설부고시 제34호로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총면적 19.2㎢이며, 서울 관악구가 11.4㎢(59.4%), 금천구 2.1㎢(11%), 경기 과천시와 안양시가 5.7㎢(29.6%)를 차지한다.
능선 3거리를 떠나 쉼터/전망데크에서 일행 함께 원경을 감상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오름길은 끝나고 여기서부터는 ‘사당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산천경계 좋고 바람도 시원한 유람코스다.
11:46 ‘국기봉’을 왼편으로 보며 헬기장을 지났다. 떠날 때 보이지 않던 장명균 대장은 먼저 올라와 있었다. 11:53 거북바위에 이르러 사진들 찍느라 한동안 부산스러웠다.
거북바위와 인근 전망대에서 10여 분 정도 머물며 시원하게 트인 사방팔방 원경을 감상했다. 남쪽으로는 관악산 정상과 늘어선 연봉들이 멋진 파노라마를 펼치고 있었으며, 북서쪽으로는 연무 속에 약간 흐려져 보이는 서울시가와 고층아파트군들이 딴 세상의 낯선 풍경처럼 느껴졌다.
관악산은 서울 경복궁의 조산(祖山) 또는 외안산(外案山)이 되는데, 산봉우리의 모양이 불과 같아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이라 하여 풍수적으로 화산(火山)이 된다. 그래서 이 산이 바라보는 서울에 화재가 잘 난다고 믿었다.
관악산으로부터의 화마를 누르기 위해 그 상징적 의미로 산꼭대기에 못을 팠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앞 양쪽에 불을 막는다는 상상의 동물인 해태를 세워 놓았다고 한다.
조선 태조는 화환(火患)을 막기 위해 무학의 말에 따라 관악산에 연주(戀主)·원각(圓覺) 두 사찰을 세웠다고 하며, 서울의 숭례문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과 관악산을 잇는 일직선상에 배치해 관악산이 덜 보이게 한 것은 불기운을 막기 위한 풍수적 의미라고 한다.
또 서울의 모든 성문 현판이 가로인데 비해 남대문인 숭례문의 현판이 세로로 된 것도 화재를 막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MB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숭례문이 불타버린 것은 관악산 신령의 노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거북바위 인근 전망대에서 시원스레 탁 트인 사방팔방 원경을 한동안 감상한 뒤, 급경사의 철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딛으며 관음사로 향했다. 내려가는 길 저 아래 관음사가 보였다.
사진 찍느라 지체하다보니 철계단에서 내려섰을 때는 일행의 뒤꽁무니가 보이지 않았다. 관음사 방향을 가늠해 두리번거리며 내려오다 낯익은 체련장에 이르러서야 안심이 되었고 곧 뒤쳐진 동문들을 만날 수 있었다.
12:30 관음사 옆 헬기장에 다다라 내려다보니 바로 시산제 장소였다. 문웅비 총무가 내려오는 동문들을 체크하며 인원점검을 하고 있었다. 비룡 동문 46명에 손님 2명 모두 48명이 시산제에 참석했다.
관음사 옆 공터의 시산제 장소는 약간 쌀쌀했지만 아늑했다.
‘관음사’(觀音寺)라는 이름의 절은 전국(남한)에 위치가 확인 된 것만도 15곳이나 되며, 서울에도 관악구/남현동, 강북구/수유동, 성북구/정릉3동 등 3곳에 있다.
관악산 북동 기슭, 남태령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관음사는 예로부터 서울 근교 사찰 가운데 영험 있는 관음 기도도량 중의 하나였다. 1943년 이후에 쓰여진 <봉은사본말사지>(奉恩寺本末寺誌)에 의하면 관음사는 895년 신라 진성여왕 9년에 도선대사가 세운 비보사찰(裨補寺刹) 중의 하나라고 전한다.
예로부터 관음사 아래에 승방벌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 앞에 승방교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관음사는 꽤 큰 규모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1863년 철종 14년 8월에 행념이 당시 철종의 장인인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시주를 받아 개축하였고, 1975년에 중창을 발원해 7년여 동안 여러 건물을 차례로 중수하였는데,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삼성각/용왕각/범종각/요사채 등 있다.
비룡 동문들이 지켜보고 정순배 회장과 윤익상 총대장이 지휘하는 가운데 장명균 박상복 황근수 산악대장과 문웅비 총무가 제상을 차렸다.
12:35 제물점시 후 ‘시산제 선포’로 계사년 관악산 시산제가 시작되었다.
국민의례는 생략하고, ‘강신/초혼/참신/초헌’(降神/招魂/參神/初獻)을 겸해 정순배 비룡 회장께서 첫 잔을 올리며 제례가 진행되었다. ‘산악인 선서’를 한 다음 윤익상 총대장이 ‘독축’(讀祝)한 후 ‘아헌’(亞獻)의 잔을 올렸으며, 산악대장들과 문웅비 총무의 ‘종헌’(終獻)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참석한 동문들의 기수별 ‘헌작’(獻酌)이 한동안 계속되었으며, 12:55 ‘소지’(燒紙)를 끝으로 제례는 끝나고, 기념촬영을 하고 나서 마지막 순서로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飮福)이 시작되었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홍어-돼지고기-김치와 순희/장수 막걸리로 홍탁 삼합의 고향맛을 즐기며 고사떡도 먹었다. 뭐니뭐니 해도 시산제는 마지막 차례 음복 시간이 제일 즐거운 듯 보였다. 먹고 마시고 방담하며 비룡 얼굴 모습들이 붉으스레...
음복까지 마치고 나니 14:00시가 다 되었다. 조심조심 언덕길을 내려와 사당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가했다.
동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즐겁다!!!
항상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거북바위위에서 찍은 기년 사진이 어디 있었나 했더니 선배님 사진기 속에 있었네요
즐거웠어요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달에 또 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