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몰래 빼돌린 돈으로 학교 앞 노점에서 고래고기를 사먹고,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짝사랑하는 동네 누나의 속옷을 몰래 훔치고, 월남전에 다녀온 형에게 전쟁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아버지가 드실 막걸리가 담긴 주전자에 입을 대고 홀짝홀짝 술맛을 보고….
1950~60년대 유년을 보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졌을 법한 추억이다. 가난이 보편이었기에 부끄럽지 않았고, 맨발에 넝마 같은 책보를 메고 20리를 걸어 학교에 다녀도 힘겹기는커녕 그저 신나고 재밌기만 하던 시절.
소설가 김양호(고21회) 동문은 자신의 소년시절 기억을 더듬어낸 책 <내 어릴 때 꿈은 거지였다>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친구들에게 그 시절의 꿈을 돌려준다. 하지만, 이 책이 겨냥한 대상은 '이미 늙은' 50대들이 아니라, 지금 유년을 보내고 있는 아이들이다.
결핍과 곤궁을 모르고 크는 요즘 아이들. 2006년 현재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가난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의 진의를 모른다.
김양호의 이번 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가난이 줄 수 있는 선물 즉, 겸양과 안분지족 그리고 가난 속에서도 결코 포기해선 안 될 희망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렁이는 푸른 파도와 부서지는 하얀 포말의 도시 전라남도 목포. 그곳에서 10대를 보낸 김양호. 캐러멜 하나, 돼지고기 한 점이 아쉬운 궁핍한 시절이었지만 그때를 추억하는 작가의 목소리는 온통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목포는 내 어린 시절이 오롯이 담겨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태어나 자랐고 유달산을 오르내렸으며, 대반동과 뒷개, 삼학도 바닷가에서 헤엄을 쳤다. 거칠고 드센 바닷바람을 맞고 자라면서 도전하는 기질을 배웠고,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뭔가 죽을 만큼 열심히 해봐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거지가 되고 싶었던 소년... 비극을 통해 세상을 배우다
책은 수십 여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돼있다. 그것들 중 기자의 눈길을 가장 강렬한 힘으로 잡아챈 건 '사주를 볼 줄 알고, 한자도 잘 읽던 이상한 거지'에 관련된 이야기다.
소년 김양호의 집 근처에서 구걸을 하던 거지. 그는 가끔 마약성분이 함유된 약을 사다달라고 부탁했고, 언제나 넉넉한 심부름 값을 줘 김양호를 감동시켰다.
거적 하나 깔고 깡통 하나 들면 아무 걱정 없이 세상 어디로도 떠돌 수 있을 것만 같아 소년은 거지를 부러워한다. 심지어 "내 꿈은 거지가 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다닌다.
하지만, 삶의 비극성은 어디에나 잠복하고 있는 법. 그 거지가 실상은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었고 마약중독에 빠져있었으며 스스로 자신의 삶에 절망해 얼어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소년 김양호. 그 비극적 체험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정신적 키가 훌쩍 자랐음을 숨김없이 고백한다.
그리고 속절없는 세월이 흘렀다. 거지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는 교수가 됐고, 소설책 4권과 평론집까지 출간한 문인이 됐다. '가난했던 유년시절의 체험'도 분명 오늘날의 김양호를 만든 자양분 중에 하나가 아니었을까